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.10 민주 항쟁 (문단 편집) ==== [[이한열]]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==== 그리고 6월 9일.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,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. [[연세대학교]]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. 당시 학생들은 '전두환-노태우 화형식'을 끝낸 후 교문 앞으로 진출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.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들은 [[최루탄]]을 발사했는데, [[폭동적 시위진압|규정을 무시하고]] [[미필적 고의|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]][* 본래는 45도 위로 세우고 발사해야 한다. 당시 경찰은 "수평사(射)는 불가능하게 방아쇠장치가 되어 있다"고 발표했으나, 그 후 광주집회에서 당시 학생들이 노획한 장비로 진압경찰들을 향해 SY-44를 수평발사하며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. 안전장치가 있었던 건 맞는데, 총기를 아예 눕혀 쏘거나, [[이쑤시개]]로 안전장치를 무력화 하는 등의 방법이 경찰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.] 연세대생 [[이한열]]의 후두부에 직격한 것이다. 이한열은 쓰러졌고, 같은 학교 [[도서관학과]] 학생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[[세브란스 병원]]으로 호송됐다.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[[로이터|로이터 통신]]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, 이 사진이 [[뉴욕 타임스]] 1면과 [[중앙일보]]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. 이종창과 이한열은 이 집회 이전까지는 서로 전혀 몰랐던 사이였다고 한다.[* 2016년 뉴스타파에서 이종창이 직접 언급했었는데, 당시 이종창 본인은 학생을 보호하는 역할이었고, 이한열이 쓰러져 있던 상황에서 전경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부축을하여 학교 안으로 올라갔었고, 당시 [[이상호(기자)]]는 당시 부축한 선배들과 함께 이한열의 다리를 잡고 있던 상황에서, 선배들이 지도교수를 부르라 해서 부른 뒤에 [[세브란스 병원]]으로 호송됐었다고 한다.] 당시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당시 사진을 찍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기자에게 연락을 했는데,[* 당시 [[연세대]] 정문 앞 굴다리에는 경찰과 더불어 사진기자들의 대열이 마련되어 있었다. 외신기자들은 이 구역을 연세 비치(Yonsei beach)라고 불렀고, 로이터 통신 파견 사진기자가 피격 직후 [[이한열]] 열사 앞에 달려가서 사진을 찍고 바로 빠져나왔다. [[연세대]] 정문 앞은 [[최루탄]]으로 뿌옇게 변했었다.] 당시 정태원 기자는 출근을 하지 않아 정태원 기자의 서랍에 있는 사진들을 가져가라 라고 해서 문제의 사진을 가져갔고, 조선일보에 난 사진 말고 이 사진을 편집국에 가져갔다. 그 후 편집국 일부에선 데모를 유발할 위험성이 큰 사진이라며 말렸으나, 이창성 사진부장이 '''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'''을 해 암묵적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준비를 각오하고 사진을 키워 신문에 게재했다는 일화가 있다.[* 원 출처: <한국신문사진론> - 장충종 저. 눈빛. 1998. p70~71.] 하지만 사진부장에게는 다행히도, 이 당시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정작 보안사령부조차 그를 끌고 가 고문을 할 틈이 없었다. 언론사 간부를 불러 갈굴 생각을 하는 것보다 시위대가 계속 불어나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. 동아일보는 6월 10일자에 학우들에게 들려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사진이 올라왔고,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. 버스에서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본 최병수 작가는 바로 그날 밤 연세대 총학생회로 달려가 판화 제작의사를 밝힌 뒤 '한열이를 살려내라'라는 문구를 담은 목판화를 제작하였고[* 당시 기획부장을 만나, 현찰 5만원을 주면서 빨리 하자라고 해서 학교 전체를 뒤져 재료를 구했고, 학생 3명과 함께 밤 새 제작을 했다고 한다.], 이는 보도 다음날 스카프와 손수건 등으로 만들어져 시위 참여자들에게 배포되었다.[* 작가가 당시 상황을 말하기를 처음에는 180장을 만들고, 본인은 작업실에서 잠시 잤다가 연세대로 달려갔는데,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가슴에 붙히고 구호를 외치면서 연대 백양로를 걸으면서 나오는 걸 보고 울컥했다고 한다.] 연세대 학생회관에는 목판화를 확대한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. [[파일:attachment/1100755353.jpg]] [[파일:00394430601_20110610.jpg]] 이 사진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의 종지부를 찍는 촉매제로 작용했으며, 훗날 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. [[파일:o-LEE-900.jpg]] 한편 [[연세대학교]]에 [[경영학과]] 학우 [[이한열]]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,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. 예비역 출신부터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[[세브란스병원]] [[중환자실]]을 지키러 나섰다.[* 당시 시위를 보면 투석전은 기본 사양에 화염병같이 위험한 시위도구가 자주 사용되었다. 그로 인해 너무 급진적인 시위대에 반감을 가진 것이지, 실제로 시위대를 빨갱이나 그런 것으로 오인했던 것은 아니다. 이런 묘사는 [[최규석]] 작가의 [[100도]]라는 만화에서 잘 표현된다.] 당시엔 이런 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. 이런 관행은 민주화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. 19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시신 탈취 사건과 2016년의 [[백남기]] 농민 시신 부검 논란도, 적어도 유족들과 [[민중총궐기]] 당사자들에게는 이러한 의도로 비춰지고 있다.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, 이외에도 대회 당시 두 명의 대학생이 경찰의 구타 끝에 사망한 사실이 있었다. [[1960년]] [[4.19 혁명]] 당시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. [[김주열]], [[이한열]] 모두 [[최루탄]]에 맞아 사망했으며, 이를 기점으로 범국민적 시위로 확산되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. '''[[역사는 반복된다|결국 역사는 반복되었다.]]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